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단 편집) == 역사 == 초대 베트남 총독인 사르네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 제독이 부임한 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간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다. 폴 두메르는 강력한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였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다.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에 부여하고, 마을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 조치로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였다. 베트남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던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이 지역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확산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는 걸 극히 죄악시하던 베트남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바로 다음 시기 총독부 역시 토지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 + 소작료,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마구 식민지인들을 쥐어짜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 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베트남의 토지를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베트남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빼앗은 것이다. 이 결과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런 악조건은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쯔꾸옥응으|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따르면 이는 베트남인들의 결속을 강화시켰으나 한편으론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인도차이나인(캄보디아인, 라오스인)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주로 베트남인들을 관리로 기용하면서 인도차이나 내부에 베트남인과 라오스인, 캄보디아인 간의 격차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베트남인들에게는 인도차이나라는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든 반면에 라오스인과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전혀 공감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가 그대로 독립한 반면에 인도차이나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각각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독립하게 되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 굴절이 존재하는 프랑스어와는 달리, 동사원형과 명사 위주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특징이었다.]라는 [[피진]] 프랑스어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일부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불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산을 불리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도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물론 현대 라오스의 농업은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프랑스 치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아진 편이다.]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폭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